각 나라의 세대별로 가지는 다른 나라에 대한 이미지는 흥미로운 부분들이 많은데, 한국의 40대 이후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중국과
20,30대가 생각하는 중국의 이미지는 너무 상이합니다. 온라인 커뮤니티 활동들을 많이 하는 사람들일수록 예상을 하겠지만,
20,30대가 생각하는 중국은 최악이다. 중국이라는 나라는 미개한 나라와 시끄러운 나라 정도로 요약이 되는데 참 신기하게도
중국의 20,30대도 한국에 대한 이미지가 다른 세대들에 비해 크게 부정적입니다.
그럼 사람들은 궁금할 수 있다. 중국에서 한국 드라마,한국음악, 한국영화 등이 붐 아닌가요? 중국에선 한국 콘텐츠를 불법으로 다운받아서 몰래들 본다고 하던데 적반하장 아닌가요? 하는 식의 질문들 말입니다.
중국은 몇 년 후면 전 세계 인구 1위 타이틀을 잃을 예정이지만, 지금까지 세계 최고의 인구를 자랑하고 있습니다.
14억, 이 수치는 우리에게 와닿지 않는 수치일 수 있습니다. 한국은 5천만이라는 수치를 가지고 있으니 더욱더 그러할 것이다.
여러분은 한국에서 살면서 미친놈들, 정신없는 놈들 등 이상한 사람들을 거의 매일 같이 보고 삽니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동안에도 이상한 놈들이 나를 건드리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중국에선 그런 사람을 만날 확률이 수치상으로만 봤을 때 28배이다. 이건 또 수치상으로만 봤을 때, 좋은 사람을 만날 가능성도 그만큼 만들어집니다.
오랜 시간 외국에서 생활하며 지냈다. 중국 사람들의 성조는 길거리에서나 건물 앞에서나 신경에 거슬릴 정도였고 상대도 하기 싫다는 생각도 많이 했습니다.
한국에 들어와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하면서 다시 중국 출장도 하러 갈 기회들이 많이 생겨 다양한 부류의 중국인들 만났습니다.
지적인 사람은 누구보다도 차분한 어조로 이야기를 이어갔고 시끄럽지도 않았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누구보다도 시끄럽게 남의 이야기를
잘라먹는 건 습관처럼 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게 세상의 이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중국이라는 나라에만 시끄러운 사람이 사는게 아니라, 한국에도 그 이상으로 시끄러운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앞에서 언급했듯이, 28배의 차이가 인간 개개인의 특성을 더 확장해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처럼 느낄 수 있습니다.
한국의 60년대와 70년대가 혼란과 혼돈의 시기였듯 전 세계의 많은 나라들이 이 시기에 비슷한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국의 60~70년대 이야기는 다른 글에서도 깊게 이야기할 예정입니다.
이 글에선 중국의 60~70년대 이야기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중국 문화혁명이라는 단어를 들어보신 적이 있나요?
전 1994년쯤에 개봉했던 중국 영화 '인생' 이라는 영화에서 처음 접했습니다. 중국의 소설가 '위화' 의 작품이 원작입니다.
감독은 중국이 자랑하는 장이머우(한국에선 장예모 감독으로 더 유명하죠) 주연은 장이머우의 페르소나 공리.
이 영화에서 한 남성과 한 여성의 삶이 국가와 사회의 정책에 어떻게 움직이고 변화되는지를 두 사람의 인생 전체를 투과하면서 보여줍니다.
영화를 접했을 때도 저에겐 아주 충격적으로 와닿았고 아직도 인생영화 100선 안에 들어가는 영화중에 하나입니다.
아직 시청하지 못하신 분들은 이번 기회에 한 번 접해보시는걸 추천합니다.
이 영화상에서 주된 상황 중 하나가 바로 '문화혁명'입니다.
1966년부터 1976년까지 일어난 중국 문화대혁명은 마오쩌둥의 공산주의 브랜드를 홍보하고 중국에서 자본주의와 전통주의 요소를 제거하는 것을 목표로 한 사회 및 정치 운동이었습니다. 이 운동에는 문화대혁명의 원칙을 지키는 임무를 맡은 홍위병의 조직을 포함하여 중국 젊은이들이 동원되었습니다.
홍위병(RED GUARD)은 마오쩌둥의 문화대혁명 비전을 수행하기 위해 동원된 고등학생과 대학생들로 구성된 단체였습니다. 이들에게는 막강한 권한이 주어졌고 혁명의 선봉으로 여겨졌습니다.
홍위병은 문화대혁명이 중국 사회를 구정권의 흔적에서 정화하기 위해 필요하다고 믿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을 혁명의 집행자라고 생각했으며 혁명에 위협이 되는 사람은 누구든 폭로하고 제거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믿었습니다.
홍위병의 행동들은 폭력적이고 잔인했습니다. 그들은 목표물을 공격하고 모욕을 주었으며, 던스 캡(Dunce cap : 원추형 종이 모자)을 쓰도록 강요하고 공개적인 수치심 캠페인을 벌였습니다. 또한 구정권과 관련이 있다고 여겨지는 역사적, 문화적 유물을 파괴하기도 했습니다. 이때, 중국의 정말 중요한 유물과 유적지의 파괴가 심했습니다. 이런 행동은 광범위한 혼란을 야기했고, 많은 사람이 고향을 떠나야만 했고 다른 곳을 피난처로 선택해야만 했습니다.
문화대혁명에 대한 열정에도 불구하고 홍위병은 비판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홍위병에 대한 주요 비판 중 하나는 홍위병이 너무 극단적이고 적법 절차나 법치를 고려하지 않고 행동했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협의를 뒷받침할 증거 없이 단순히 구 정권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는 이유만으로 표적이 되었습니다.
그 결과 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억울한 누명을 쓰고 처벌받아 사회적으로 큰 불안을 야기했습니다.
홍위병의 행동은 또한 광범위한 경제 혼란을 야기했습니다. 많은 기업과 기관이 문을 닫거나 운영을 축소해야 했고, 이에 따라 광범위한 실업과 경제적 어려움이 발생했습니다.
홍위병이 반대파를 제거하는 데 집중하다 보니 국민들의 필요에는 충분한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고, 많은 사람이 의료와 교육과 같은 기본적인 서비스를 받지 못했습니다.
영화 '인생' 에서 이런 비슷한 장면들이 나오는데 정말 웃을 수도 울 수도 없습니다.
일부 공산당원을 포함한 문화대혁명의 반대자들은 홍위병이 적법 절차와 법치를 무시했다고 비판했습니다.
또한 마오쩌둥의 리더쉽 스타일이 너무 권위주의적이고 이념적 순수성에 지나치게 집중한다고 비판했습니다.
비평가들은 문화대혁명이 득보다 실이 많았으며 중국을 경제적, 사회적으로 후퇴시켰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러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문화대혁명은 중국 역사에서 중요한 순간이었습니다. 문화대혁명은 중국 사회와 문화에 큰 변화를 가져왔으며,
그의 유산은 오늘날에도 중국에서 여전히 느껴지고 있습니다. 마오쩌둥의 영향아래 어마어마한 사건이 지나갔음에도
중국 북경 천안문에는 거대한 마오쩌둥의 초상화가 걸려있는 걸 보면 아직도 그의 영향력은 중국을 관통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홍위병은 혁명의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으며, 중국 사회에 구정권의 잔재를 청산하기 위해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했지만 그들의 행동은 극단적이었고 무모했습니다.
썩은 관습이라고 생각했던 부분을 잘라내었다고 생각하였지만, 아직 중국에서 안 좋은 관습들이 성행하는 걸 보면 문화대혁명은 그렇게 성공한 혁명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거 같습니다.
생각이 없으면 고통이 없는 법입니다. 그래서 나는 줄곧 쾌활했고 의기양양했어요. - 한 홍위병의 회고중
'문화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책이란 우리한테 과연 필요한걸까? (0) | 2023.03.10 |
---|---|
3.1절의 대통령 기념사와 굴욕의 역사시작 (1) | 2023.03.09 |
가짜뉴스 와 가짜정보의 문화 속에서의 확증편향 (0) | 2023.03.08 |
보수와 진보, 수구와 좌빨 사이의 회색지대 (0) | 2023.03.07 |
한국의 피해 의식 상황, 너도 가스라이팅을 하고 있어 (0) | 2023.03.07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