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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학

3.1절의 대통령 기념사와 굴욕의 역사시작

by 쁘띠감독 2023. 3.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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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1일 대통령의 기념사가 아직도 여러 여파를 주고 있습니다. 3.1절에 세종시에서 사는 어떤 목사는 보란 듯이 일장기를 

베란다 쪽에 게양하였고, 주민들이 그의 집에 항의 방문을 하였고 그 목사는 당연하다는 듯 그들을 향해 '미개하다 미개해' 라며 왜 나를

괴롭히냐는 식의 말들을 하였습니다. 

또 지난 6일에는 한국의 외교부 장관은 강제 동원 피해자 문제는 한국기업들에서 처리할 테니 일본의 기업은 처리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였고

일본은 그것에 대해 화답이 아닌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습니다. 일본 정부 입장에선 전 정부가 일본에 가진 태도와 지금 정부의 태도가 180도 다르기에 더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이는 거 같습니다. 

커뮤니티 글을 접하다 보면 일본과의 관계를 크게 2가지로 바라보는 거 같습니다.

일본이 우리에게 했던 행동들을 보면 일제는 사지도 말고 관광 가지도 말자는 부류와 

좋은 제품과 관광 거리가 많은 나라에 가는 개인적인 판단에 관여하지 마라라는 부류로 나뉘고 있습니다.

두 부류의 마음이 어떤지 충분히 이해됩니다. 

한일합병 기념엽서 ⓒ 대한민국역사박물관



한국과 일본의 관계는 오랜 정치, 문화, 경제 교류의 역사와 함께 갈등과 적대감으로 점철되어 왔습니다. 양국은 협력과 상호 존중의 시기도 있겠지만, 역사적 사건과 상호 인식에 뿌리를 둔 깊고 지속적인 적대감과 불신도 경험해 왔습니다. 

한국과 일본은 서기 4세기 일본에서 한국에 첫 외교 사절단이 파견된 이래, 1500년 넘게 접촉과 교류를 이어오고 있습니다. 

당시 한국(고구려)은 예술, 문학, 종교, 기술 등 독특한 문화와 문명을 발전시킨 강력하고 선진적인 왕국이었습니다. 반면 일본은 한국과 중국의 문화와 기술의 영향을 많이 받은 상대적으로 미개발된 열도였습니다. 일본의 통치자들은 한국의 통치 및 문화 모델을 배우고 모방하고자 했기 때문에 한국과 일본의 첫 접촉은 우호적이고 협력적인 관계였습니다.

그러나 8세기에 일본이 통일된 강력한 국가로 부상하기 시작하면서 한국과의 관계는 복잡해지고 때로는 적대적으로 되었습니다. 일본은 한국과 중국 문화의 요소를 수용하는 동시에 고유의 전통과 제도를 발전시킴으로써 독립성과 정체성을 주장하고자 했습니다. 이러한 모방과 혁신의 과정은 헤이안 시대(794~1185)로 알려진 일본의 문화적, 기술적 개화로 이어져 동아시아에서 문학, 예술, 종교, 건축 분야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업적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일본의 국력이 커지고 야심이 커지면서 일본은 한국을 라이벌이자 잠재적인 팽창 대상으로 바라보기 시작했습니다. 16세기 후반 이본은 한반도를 정복하고 식민지로 삼기 위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지휘 아래 두 차례에 걸쳐 한국을 침략하였습니다. 

기존의 일본은 왜구라고 불리는 해적집단이 한국의 남쪽 지방을 습격하여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는 형식을 보이기는 했었습니다.

하지만 이 시기부터 일본 권력자들의 생각은 명확해졌습니다. "한국은 우리가 대륙으로 진출할 중요한 통로이다."

일제시대 여권 ⓒ 대한민국역사박물관



두 차례의 침략은 한국과 중국의 연합군에 의해 격퇴되었지만 인명 손실, 자원 고갈, 문화재 파괴 등 막대한 대가를 치렀습니다. 

임진왜란으로 알려진 이 침략의 유산은 오늘날까지 한국과 일본 사이에 역사적 불만과 분노의 주요 원인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19세기에 일본은 서구와의 접촉과 서구 기술 및 제도의 도입을 통해 근대화된 산업국가로 부상했습니다. 

이때 일본은 지금의 일본이 아시아에서 가장 큰 힘을 발휘하는 나라가 되는 원천을 마련하게 됩니다. 

일본의 수많은 사람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서구 문명이 들어오는 걸 반대하고 저항했습니다. 

하지만 역사의 결과상 통치자들의 결정은 일종의 '신의 한 수'가 되어버렸습니다. 

세상일이라는 게 참 아이러니합니다. 

조선징병독본 ⓒ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일본은 스스로를 동아시아의 모델이자 리더로 여기고 이 지역에 대한 영향력과 헤게모니를 주장하였습니다. 일본의 부상에 가장 먼저 

영향을 받은 국가 중 하나는 오랜 정치적, 사회적 혼란과 중국, 러시아, 서구의 외세 개입으로 국력이 약화하였던 한국이었습니다.

참 뼈아픈 시기였습니다. 무엇을 해도 더 나아질 수 없다는 국민들의 마음은 게으르고 나태한 마음으로 변하게 했고 

자신보다 못하다고 생각되는 사람이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양반'이라는 단어를 취득하는 걸 보며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요?

또한, 지금의 한국 모습이 왜 이렇게 중첩되는 건 왜일까요?

일본은 한국에 일련의 불평등 조약에 서명하도록 강요했고, 이를 통해 일본에 치외법권 및 경제적 특권을 부여하여 사실상 한국을 

일본의 보호령으로 만들었습니다. 1910년 일본이 한국이 병합하면서 한국은 주권을 잃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지속된 

잔인하고 착취적인 식민 통치받게 되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의 마지막 문장입니다. 

"순종실록 4권, 순종 3년 8월 29일 양력 - 일본국 황제에게 한국 통치권을 양도하다."

중일전쟁 발생 5주년 기념우표 ⓒ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전후 일본은 연합국에 의해 점령당하고 한국 식민 지배를 비롯한 제국주의 야망과 전쟁 범죄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한일 관계는 극적인 변화를 겪었습니다. 한편 한국은 남과 북으로 분단되어 미국과 소련 사이의 냉전 격전지가 되었습니다. 이제 민주적이고 평화주의적인 국가가 된 일본은 과거의 잔혹한 행위를 보상하고 동아시아의 재건과 발전에 기여하고자 노력했습니다. 

일본은 한국전쟁 시기에 엄청난 경제적 이익을 맛보았습니다. 전쟁에 필요한 물자와 장비들을 조달하면서 얻은 경제적 가치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우리의 싸움으로 다른 나라에 이익을 주는 건 상기할 때마다 가슴이 아픕니다.

반면 한국은 식민 지배와 분단, 가난의 유산을 극복하고 안정적이고 민주적인 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고군분투했습니다.

전후 한국과 일본의 관계는 양국이 역사적 차이를 화해하고 공동의 가치와 이익을 바탕으로 새로운 파트너십을 구축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협력과 긴장이 공존하는 관계로 특징지어졌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65년 체결된 한일 기본 조약에 따라 일본은 

5억 달러의 무상 원조와 2억 달러의 저이자 대출을 약정받고 10년에 걸쳐 원조를 진행합니다. 

이 약정이 현재까지도 양국의 관계를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만드는 큰 조약이 될 거란 걸 그 당시 사람들은 인지하지 못했을 겁니다.

해방 조선 기념우표와 엽서 ⓒ 대한민국역사박물관



한국과 일본 사이의 호불호는 역사적 사건, 문화적 가치, 경제적 이해관계, 정치적 이념, 개인적 태도 등 복합적인 요인에 의해 형성됩니다.

호불호에 대한 고정적이거나 보편적인 패턴은 없지만 한일 관계에 영향을 미치는 가장 두드러진 요인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습니다.

1. 공유된 문화 : 양국은 상호 이해를 통해 한국 드라마, 음악, 요리가 일본에서 인기를 끌고 있으며,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2. 경제적 상호의존성 : 한국, 일본은 모두 동아시아의 주요 경제국이며, 양국의 무역 및 투자 관계는 성장과 안정에 필수적입니다.

많은 한국과 일본 기업이 합작회사를 설립했으며, 많은 한국 관광객이 일본을 방문하고 일본도 한국을 방문하는 걸 즐겨합니다.

3. 전략적 연계 : 한국과 일본은 특히 북한, 중국 및 기타 지역 강대국의 위협이 증가하는 상황에서 동아시아의 평화, 안보 및 안정 유지에 대한 공통의 이해관계를 공유합니다. 양국은 모두 미국의 동맹국이자 유엔 회원국입니다.

4. 역사적인 불만 : 한국과 일본은 오랜 분쟁, 침략, 식민 지배의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이는 집단적 기억과 정체성에 깊은 상처를 남겼습니다. 많은 한국인은 일본을 역사적 침략자이자 전쟁 범죄의 가해자로 여기고, 많은 일본인은 한국을 배은망덕하고 적대적인 이웃으로 여깁니다.

5. 민족주의 : 한국과 일본 모두 강한 민족주의 정서를 가지고 있으며, 이는 때때로 상호 적대감과 편견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일본의 민족주의 단체는 일본의 전쟁 잔혹 행위와 식민 지배를 부정하거나 경시하는 반면, 한국의 민족주의 단체는 일본을 악마화하고 일본의 잘못을 과장한다는 비난을 받아왔습니다.

6. 영토 분쟁: 한국과 일본은 일본해/동해에 위치한 독도/다케시마 섬의 영유권을 둘러싸고 오랜 기간 분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한국은 이 섬들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으며, 일본은 이 주장에 이의를 제기하며 자국의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한일 관계의 복잡성과 민감성을 고려할 때, 한일 문제에 대해 단순하거나 포괄적인 해결책을 제시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일 양국이 역사적 과제를 극복하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취할 수 있는 몇 가지 조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1. 대화와 화해: 한일 양국은 역사적 불만에 대해 진지하고 열린 자세로 대화하고 상호 이해와 화해를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이 대화에는 정부 당국자와 전문가뿐만 아니라 학자, 활동가, 예술가, 청소년 등 시민사회 주체들도 참여해야 한다.

2. 교육과 인식 제고: 한일 양국은 국민들에게 상대방의 역사적 사실과 관점에 대해 교육하고, 상호 역사와 문화에 대해 보다 미묘하고 공감할 수 있는 이해를 증진해야 합니다.

3. 사죄와 보상: 일본은 과거의 잘못에 대해 명확하고 진정성 있는 사과를 하고 전쟁 범죄와 식민 지배의 피해자들에게 적절한 보상을 제공해야 합니다. 이러한 사과와 배상은 공동 역사 조사위원회 설립, 유적지 및 기록물 보존, 문화 교류 및 협력 증진 등 구체적인 행동이 수반되어야 합니다.

4. 신뢰 구축과 협력: 한일 양국은 안보, 경제, 문화, 환경 등 다양한 분야에서 신뢰와 협력을 강화해야 한다. 이러한 협력은 상호 존중과 평등, 공동의 이익에 기초해야 하며, 동아시아의 평화와 번영에 기여해야 한다.

5. 국제 협력: 한-일 양국은 아세안+3, 동아시아정상회의, 유엔 등 지역 및 글로벌 협력에 참여하고 기후변화, 테러리즘, 전염병 등 지역 및 글로벌 도전 해결에 기여해야 한다. 이러한 협력은 다자주의, 국제법 존중, 분쟁의 평화적 해결이라는 원칙에 기반해야 합니다.



한국과 일본의 관계는 협력과 긴장으로 점철된 복잡하고 논쟁적인 역사이며 역사적 사건, 문화적 가치, 경제적 이해관계, 정치적 이념, 개인적 태도 등 다양한 요인에 의해 형성된 관계입니다. 한국과 일본 사이의 호불호는 고정적이거나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 복잡하고 진화하는 양국 관계의 특성을 반영합니다. 한국과 일본은 역사적 과오를 극복하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진지하고 열린 대화를 나누고, 국민들에게 상대방의 역사적 사실과 관점을 교육하고, 과거의 잘못에 대해 명확하고 진정성 있는 사과를 하고, 다양한 분야에서 신뢰와 협력을 증진하고, 다자주의, 국제법 존중, 분쟁의 평화적 해결 원칙에 기반하여 지역 및 글로벌 협력에 참여해야 합니다. 이를 통해 한국과 일본은 공동의 가치와 이익을 바탕으로 새로운 파트너십을 구축하고, 동아시아를 넘어 전 세계의 평화와 번영, 화합에 기여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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