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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학

게르하르트 리히터, 작가란 이런 것이다.

by 쁘띠감독 2023. 3.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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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hoto by Werner Gensmantel via nmn.de

 

종로에 가면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정말 많습니다.

파고다 공원에 가면 바둑과 장기를 두면 내기를 하는 할아버지들도 있고 공원바깥으론 무상급식을 먹기 위해 줄 선 행렬도 쉽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이 공원은 우리나라 최초로 생긴 도심내 공원입니다. 

1897년에 처음 조성되었을땐 모던보이와 모던걸이라고 불리는 서구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젊은 세대들이 모여서 자신의 멋을 뽐내던 곳이었습니다.

ⓒ Photo via my9arts.es

현재는 그런 모던한 공간과는 먼 곳이 되어버리고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생활비를 절약하기 좋은 곳으로 되어버렸습니다.

한국이라는 나라는 적극적인 경제개발에만 몰두한 나머지 이제야 사회문제가 점점 대두되고 있습니다.

뭐 한국뿐만 아니라 우리 근처의 나라들도 비슷한 상황입니다.

파고다 공원은 1897년 개장한 이래 역사 문화의 중요한 장소로서의 역할을 해왔습니다.

아직도 가면 문화재와 독립운동 기념물들이 있으니 노인들이 많아서 분위기 안 좋다고 넘겨버리지 말고 한번 둘러보는 걸 추천합니다.

건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 나라는 몇 가지 특징들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노인세대와 젊은 세대의 대화가 활발하다는 지점이 있습니다.
그런 힘을 가지고 있는 나라 중 하나가 독일입니다.

독일은 오랜 시간 한국과 같이 긴 분단의 시간을 보냈고 통일이 된 후에도 여전히 동독지역이었던 곳과 서독지역이었던 곳의 경제적 차이는 여전합니다.

독일은 자신들이 벌인 세계대전의 빚을 아직도 덤덤히 갚고 있는 중입니다.

1932년에 독일 드레스덴에서 태어난 세계적인 작가가 있는데 그 사람은 바로 게르하르트 리히터입니다.

독일 드레스덴 지역은 많은 독일인들이 자랑하는 아름답고 문화유산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랑받는 곳입니다.

한국으로 바꿔보자면 '경주' 지역 같은 곳이라고 보면 됩니다.

독일의 동쪽지역에 위치한 이곳은 소비에트 연방 지금의 러시아의 직접적인 지배하에 있었습니다.

세계대전이 끝나고 난 뒤 독일의 서쪽은 민주주의 진영이 맡고 동쪽은 공산주의 진영이 맡게 되다 보니 동쪽에 위치한 드레스덴의 사람들은 싫으나 좋으나 공산주의 사상교육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 Photo via nrpberlin.de

게르하르트 리히터는 1950년쯤엔 스텐실 간판 사무소에서 선동문구를 작성하는 페인터 일로 하루하루를 보냅니다.

그 당시 리히터의 아버지는 같은 간판 사무소에서 청소부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간판 사무소의 감독관이 리히터의 미술 재능을 바로 알아보고 간판사무소에서 허송세월을 보내면서 하루가 지나가길 바라지 말고 당장 미술대학에 입학하라고 권유합니다.

리히터는 1951년부터 1954년까지 드레스덴 미술 아카데미에서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배웁니다.

그는 이런 사조의 미술에 대해 환멸을 느꼈습니다.

이유는 공산주의 체제에서 파블로 피카소 같은 화가는 인민을 위해 그리지 않는다는 미명하에 저질 화가로 취급받고 자아를 버리고 인민을 인한 그림을 그리라는 주문을 받은 그는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수업과 별개로 그는 전위적인 기법들과 소비에트 연합에서 추구하는 현대미술이 아닌 본인이 생각하는 기법들에 대한 연구를 계속해 나갑니다.

1961년 리히터는 인생의 큰 전화점을 맞이하게 되는데 바로 독일의 서독지역에 위치한 뒤셀도르프 미술대학으로 이동한 것이었습니다.

지금도 뒤셀도르프는 미술대학의 핵심지역입니다.

세계적인 작가군들이 끊임없이 나오고 갤러리와 미술관 등의 기획전은 하나하나가 수작입니다.

유명세만 가득한 작가들을 초대해서 보여주는 전시만 하는 곳들과는 비교도 안 되는 기획을 하는 곳입니다.

여기서 리히터는 시그마 폴케, 콘라드 피셔-루에크와 자본주의 리얼리스트 그룹을 결성하고 작업을 진행합니다.

동독에선 접하기도 힘들었던 플럭서스 문화와 팝아트의 영향도 이때쯤 받은 것으로 예상됩니다.

뒤셀도르프에 정착하고 1년쯤 뒤인 1962년부터 사진에 기반 회화를 제작하기 시작하였고 사진이미지를 인공적으로 붓질하여 재가공하였습니다.

지금은 수많은 화가들이나 예술가들이 이런 기법을 차용하긴 하지만 1967년의 예술기조에선 상상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의 이러한 시도는 예술에서 진정성과 실재성에 대한 문제를 우리에게 던져줍니다.

뒤셀도르프에서 그의 작품은 잭슨 폴록이나 데 쿠닝 같은 미국 화가들의 추상 표현주의의 영향을 많이 받는데 이러한 부분의 결과물이 'Abstract Painting' 같은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보고 있다 보면 우리가 캠핑을 갔을 때 불멍 때리고 있는 기분으로 멍하게 보게 되는 힘이 있습니다.

우리가 불멍을 좋아하는 이유를 진화심리학자들이 말하길 피곤에 대한 보상심리라고 표현하는데 이 그림들이 그런 힘을 가져다줍니다.

자연이 만들어내지 않고 인간이 만들어냈는데 이런 힘을 낸다는 게 참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실제 리히터는 서독에서의 초창기 작업들이 획기적임에도 불구하고 항상 아웃사이더였습니다.

자의 반 타의 반이라고 볼 수 있는데 리히터 스스로 예술계의 풍습과 가식적인 모습에 회의적인 모습으로 멀리하였고 리히터는 스스로의 작업을 자기 비하적으로 묘사하였습니다. 

그와는 별개로 그는 사회에서 예술가는 어떤 역할을 해야 되는지 또 재현하는 것과 인식의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한 부분을 탐구하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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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크푸르트시 문화부에서 30년 이상 근무한 학예관의 말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리히터는 드레스덴과 뒤셀도르프에서 같이 공부했던 친구들이 잘 나갈 때 거의 혼자만 주목받지 못한 작업활동을 하였는데, 친구들이 60대쯤 은퇴하고 사라질 때 리히터의 전성시대가 시작되었다."

작가라는 이름으로 60대가 될 때까지 평가절하 받는 사람은 견디기 힘들었을 겁니다.

같이 미술공부했던 친구들은 미술관과 갤러리에서 초대받아 전시를 하고 자신의 재능을 뽐내고 있는데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는 그의 심정은 일반적인 사람이 이해한다기보단 선수들끼리 이해하는 감정이지 않나 싶습니다.

리히터의 작품 중 꼭 봐야 하고 분석해 봐야 하는 것은 '1977년 10월 18일' 시리즈로, 1970년대 독일에서 활동한 좌익 테러 단체의 신문 사진을 바탕으로 15점의 그림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정치적인 폭력의 본질 그리고 그런 폭력에 대한 대중의 인식을 형성하는 미디어의 역할에 대한 작업입니다.

최근에 한국에서도 루이뷔통 갤러리에서 2021년에 많진 않지만 갈증을 풀어줄 정도의 작품들이 내한을 한적 있습니다.

그의 작업이 서울시립미술관이나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다양한 사이즈로 기획전시되는 그날을 기대하겠습니다.

이런 할아버지가 많이 있는 나라에서 살고 싶습니다.

거장이 득실대는 나라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거장의 표정을 보겠습니다.

ⓒ Getty Images_Robert Micha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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