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장춘 박사는 한국의 역대 과학자들의 명단 중 절대 빠지지 않는 인물입니다.
농생물학자, 식물학자, 원예육종학자이며 농학박사였습니다.
우 박사는 1898년 일본 도쿄에서 태어나 겹꽃 페튜니아 육성, 씨 없는 수박 개발 등 다양한 연구 업적을 남겼습니다.
1950년 한국으로 귀국한 후에는 중앙원예기술원장과 농사원 원예시험장 장을 역임하면서 한국의 농업과 원예를 발전시키는 기여 했습니다.
1959년 서울에서 병사하기 전까지 부산시 문화상과 대한민국 문화포창도 받았습니다.
이렇듯 그의 삶은 대한민국의 농학과 식물학을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몇 가지 역사 장면을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우 박사의 아버지는 우범선 이란 인물입니다.
조선 후기의 무신이었습니다.
1857년 충청북도 단양군에서 태어나 1876년 무과에 급제한 뒤 별기군과 훈련대의 간부로 활약한 조선과 대한제국의 무신이었습니다.
그는 개화파와 친일파로 속하면서 일본의 근대화를 부러워했고 일본과의 동맹을 주장하였습니다.
1895년 을미사변 때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와 공모하여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가담 했습니다.
당시 그는 궁의 호위를 맡던 높은 직책이었고 사무라이들이 쉽게 궁에 잠입할 수 있도록 궁의 문을 열어주었습니다.
그는 명성황후의 외교전략인 친러시아적인 정책을 펼치면서 일본의 독점적 지배권 확립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이 사실을 안 그 당시 조선인들은 분노를 표출했고 고종은 체포령을 내렸지만, 이미 우범선은 일본의 도움을 받아 1897년 일본으로 망명한 후 일본인 부인-사카이 나카를 맞이합니다.
사카이 나카 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가 바로 '우장춘'입니다.
우장춘 동생도 한 명 더 있는데 '우홍춘'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우장춘 박사가 일본에서 극심한 빈관과 주위의 핍박 속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다녔다고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일본 정부 기록물 센터에 있는 자료에서 우범선에게 지원했던 돈들이 나열되어 있습니다.
그 당시 일반적인 가정의 소득보다도 훨씬 높은 소득을 취득하였고 우범선이 특별한 직업이 있어서 그만큼의 소득을 얻지는 못했을 겁니다.
을미사변 때 일본의 명성황후 시해를 도운 것에 대한 보답들을 받았다고 봐야 합니다.
우장춘 박사는 이후에 도쿄제국대학 지금의 도쿄대학교를 입학합니다.
우 박사가 일본에서 차별을 받았다면 도쿄제국대학을 졸업한 후 일본 농림성 농업시험장에 취직한 후로 예상할 수 있습니다.
18년간 육종연구에 몰두했지만 승진을 계속 누락당했으니 18년간 데리고 있으면서 승진을 시키지 않는다면 충분한 의심이 가능합니다.
우범선은 일본 히로시마현에 위치한 구레시에 있는 고영근의 집에 초대받아가서 칼로 목과 턱을 찔러 살해당합니다.
고영근의 이러한 행동은 대한제국 정부의 밀정 명령에 따른 행동이었고, 살해 후 바로 경찰에 가서 자수합니다.
일본 재판에선 사형을 선고받으나, 고종의 선처 부탁으로 8년간의 복역을 지낸 후 1911년에 출소됩니다.
이후 고영근은 한국으로 돌아와 고종과 명성황후가 합장된 홍릉의 파수꾼인 능참봉이 됩니다.
1923년, 그는 대한민국의 독립을 보지 못한 채 7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다시 우장춘 박사로 돌아와 그는 1950년에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일본인 부인과 자녀들을 일본에 남겨 두었고 한국어 교육을 자녀들에게 일체 시키지 않았던 부분도 주목할 부분입니다.
우 박사는 자신의 아버지 우범선이 친일파로서의 역할을 인정하지 않고 부인을 하였습니다.
대한민국의 주권이 일본에게 넘어갈 이 시기에 또 다른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안중근이라는 인물입니다.
그는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역에서 일본의 조선 통감이었던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여 암살하였고 1910년 3월 26일 뤼순 감옥에서 교수형으로 사망했습니다. 당시 그의 나이는 31세이었습니다.
이후 안중근은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수여받았습니다.
그는 아들을 한 명 두었는데 1909년에 태어난 '안준생'이라는 인물입니다.
안중생은 아버지가 어떻게 생겼고 어떻게 죽음을 맞이했는지 모릅니다.
그가 태어났을 때 안중근은 하얼빈에서 거사를 치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1909년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직후 체포되었고 안준생은 어머니와 함께 중국 상해로 망명하였습니다.
상해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었고 그는 거기서 지원을 받으며 의병운동에 참여하기도 하였습니다.
그 당시 그는 중국어와 영어를 배워 국제적인 감각을 키우는데 매진합니다.
하지만 윤봉길의 훙커우 공원 의거 이후 임시정부가 상해를 떠나버리면서 그는 낙동강 오리알이 되어버렸습니다.
지켜줄 버팀목이 사라져 버린 상황에서 일본의 감시와 탄압을 상상이상으로 받게 됩니다.
일본은 우범선의 사례에서도 보듯이 일본과 관련된 자녀들에 대한 필터링이 엄청나게 진행하는 나라입니다.
1939년에 일본에 의해 이토 히로부미의 아들과 화해하는 연출을 강요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이 사건은 그를 친일파로 몰리고 아버지의 위업을 잇지 못한 호부견자虎父犬子 라는 사자성어를 안준생과 동일시하기도 하였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호부견자虎父犬子 는 부모의 훌륭함에 못 미치는 자식에 대한 안타까움과 조롱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김구는 그를 죽여야 할 대상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해방 후에도 고통스럽고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으며 삶을 보냈고 결핵으로 인해 병원에서 숨을 거두고 맙니다.
안중근 의거 100주년(2009년) 이후로 국내 학계, 언론이 다각도로 재조명되는 부분이 일제의 협력 자였다거나 마약상이었다는 소문들이 어떠한 증거도 찾을 수가 없다는 부분입니다.
여러분은 31세에 더 이상 자식과 아내를 볼 수 없다는 사실을 뻔히 알고 국가를 위해 거사를 치를 자신이 있으신가요?
안중근은 일반적인 사람이 아닌 범인이었습니다.
안준생은 일반적인 사람이었습니다.
만나보지도 못했던 범인의 아들로 태어나 버려 너무 많은 사람들의 기대를 받아 일반적인 삶을 살지 못한 사람의 슬픔도 느껴집니다.
여러분이 안준생으로 태어난다면 다른 삶을 살 자신들이 있으실까요?
쉽지 않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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